일제시대에 하층민의 생활수준은 정체했나?

아래 포스팅 (“일본 제국내 임금 격차”)에서 서울의 막노동자 실질임금 (후생비율)이 일제시대에 추세적으로 상승하지도 하락하지도 않았음을 보았다. 그런데 더 아래 포스팅 (“일제시대 하층민의 키가 자라고 있었다”) 에서는 빈곤층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행려 사망자의 키가 일제시대에 2센티미터 이상 커졌음을 보고한 연구를 소개했다. 그리고 체중도 증가했음을 보이는 증거도 제시했다.

이 둘은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소득이 증가하지 않았다면 음식물 섭취량도 증가하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키가 크고 살이 붙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일제시대에 위생시설이 개선되고 근대의학이 도입되면서 사망률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질병과 싸우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소모된다. 같은 양의 칼로리를 섭취하더라도 질병에 걸릴 확률이 줄어들면 키가 크고 무게가 늘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임금이 정체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일제시대에 하층민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질 임금이 불변인데 사망율이 하락해서 평균 수명이 늘었으므로 평생 소득이 증가했고 따라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 제국내 임금 격차

위 그림의 세로축은 막노동자들이 버는 임금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소비재 꾸러미를 몇개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데 이를 후생 비율(welfare ratio)라고 한다. 후생 비율이 1이면 노동자들의 돈을 벌어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 땔감, 집세 등을 내고 나면 하나도 남는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생 비율은 실질 임금 지수다.

서울의 후생비율 (가는 파선)은 일제시대에 1.5 를 중심으로 오르 내렸으며 추세적으로 상승하지도 하락하지도 않았다. 1910년경 도쿄의 후생비율 (점선)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후 30년에 걸쳐 상승 추세를 따랐다. 타이베이의 후생비율(굵은 파선)도 1910년경 서울이나 도쿄와 비슷했는데 이후 상승했지만 그 속도는 도쿄보다 느렸다.

만주의 달리안 (大連)의 후생 비율(실선)은 20세기초 상당히 높았지만 이후 꾸준히 하락해서 1938년에는 서울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이런 차이는 왜 나타난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구, 즉 노동 공급 증가 속도 차이였다. 인구 증가 속도는 일본에 비해 조선이, 조선에 비해 만주가 빨랐다.

그러나 타이완의 인구 증가 속도는 조선보다 빨랐는데 이것만 생각한다면 타이완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증가 속도는 조선보다 느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타이완의 후생 비율이 조선처럼 정체하지 않은 이유는 개간을 통해 경작지 면적을 빠르게 확대시켰기 때문이었다.*

* Cha, Myung Soo (2015) “Unskilled Wage Gaps Within the Japanese Empire,” Economic History Review 68(1), p. 28.

초등교육은 조선총독의 하사품인가?

초등학교 취학률(=초등학생수가 취학연령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 4%에서 1943년 54%로 증가했다. 초등학교 취학율 상승은 해방후에도 이어져 1960년경 100%에 근접했다. 즉 초등교육 보급의 절반 이상이 일제시대에 이미 이루어졌다.

일제시대 초등학교는 대부분 총독부가 세운 것으로 보통학교라 불렸다. 사립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매우 작았고 식민지 시대에 초등학생 수가 증가한 것은 대부분 보통학교 취학생 증가 때문이다. 보통학교 수가 늘지 않았더라면 보통학교 취학생 수가 증가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식민지기 대중교육 보급은 조선총독부가 보통학교를 건설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정부가 대중 교육 기관 건설에 거의 투자하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위 그림은 한 학교당 학생수 (실선 – 좌측 눈금), 교사 한명 당 학생수 (점선 – 우측 눈금), 그리고 한 학급당 학생수 (삼각형 – 우측 눈금)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 비율은 식민지기에 모두 증가했는데 이는 총독부의 초등학교 공급보다 초등 교육에 대한 수요가 더 빠르게 증가했고, 그래서 교육의 질이 악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일제시대에는 초등학교 입시가 있었는데 경쟁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던 사실도 교육열이 점점 뜨거워졌음을 보여준다.

즉 식민지기의 초등교육 확산은 총독부의 공급 확대와 조선인들의 교육 수요 증가가 합쳐져서 일어난 결과다. 그리고 총독부의 보통학교 건설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민간의 수요 확대에 부응한 정책일 수 있다. 식민지기에 초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이 시기에 전반적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었음을 보이는 또 다른 증거다.

to be completed

조선인 노동자들은 차별받았나?

아래 포스팅 (“식민지 조선은 커다란 노예농장?”) 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쌀값 격차가 일제시대 개막과 함께 큰 폭으로 떨어졌음을 보이고 이를 근거로 식민지 시대에는 강제되지 않은 쌀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이 존재했음을 주장했다.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임금 격차

위 그림은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또는 목포)의 비숙련 노동자 임금 격차가 일제시대에 꾸준히 감소해 갔으며 그 하락 추세가 1960년경까지 유지되었슴을 보여준다 (실선은 명목 임금, 점선은 실질 임금 격차를 나타낸다). 이는 임금이 싼 지역 노동자들이 비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저임금 지역의 노동 공급이 감소하고 고임금 지역의 노동 공급이 증가한 결과다. 이런 노동자들의 지역간 이동은 일제 시대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일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위해 자발적으로 노동 서비스를 판매했음을 말해 준다.

강제되지 않은 고용 계약이 맺어지는 노동 시장이 존재했지만 그 시장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 즉 같은 능력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임금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오늘 날에도 같은 학력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하는 남자 사무직 노동자는 여자 사무직 노동자 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을 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임금 차별(wage discrimination)은 남녀 사이 뿐 아니라 미국 같은 다인종 국가에서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임금 차별은 사회적 편견,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발생한다.

일제시대에 조선인 노동자 임금은 같은 직종에 속한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대략 40%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 조선인 노동자들이 임금 차별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 노동자들은 조선인에 비해 경험이 더 많고 훈련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 수준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 경험은 얼마나 있는지, 나이는 몇살인지, 근속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일제 시대에 민족간 임금 차별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서 관측된 임금 격차에서 민족 이외의 여러 다른 요인들 (즉 교육, 경험, 나이 등등) 때문에 발생한 임금 격차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남는 임금 격차가 있다면 비로소 조선인 노동자가 차별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시대 임금 차별에 관해서는 두 개의 중요한 연구가 나와 있다.

하나는 김종한이 1998년 경제사학에 발표한 “1928년 조선에서의 민족별 임금차별” 👉http://www.kehs.or.kr/xe/index.php?_filter=search&mid=journal&search_keyword=김종한&search_target=extra_vars2&document_srl=1487

다른 하나는 이우연이 2016년 경제사학에 발표한 “전시기(1937-1945) 일본으로 노무동원된 조선인 탄광부 임금과 민족 간 격차”👉http://www.kehs.or.kr/xe/index.php?_filter=search&mid=journal&search_keyword=이우연&search_target=extra_vars2&document_srl=17262

김종한의 연구는 나이 차이, 숙련 직종인지 여부, 노동시간 차이에 따른 임금 격차를 제거하고 나서도 조선인들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에 비해 적어도 37% 정도 낮은 임금을 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김종한 자신도 인정하듯이)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 중 일부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임금 차별의 정도가 과대평가된 것인지 과소평가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우연의 연구는 이차대전기 일본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 및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격차가 있었지만 그것은 조선내 민족간 임금 격차보다 현저히 작았고, 근속 기간과 작업 능률 차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본 탄광에서 민족간 임금 차별은 없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 역시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 중 일부만을 고려한 것이므로 임금 차별이 없었다는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이 임금 차별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여럿 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그 요인들이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불완전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임금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종한이 임금 차별 차별 격차라고 계산해서 내놓은 결과의 상당 부분은 일본인 노동자들의 높은 교육 수준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김종한이 분석한 데이타에는 각 노동자의 교육 수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지 않다.

이우연이 분석한 이차대전기 일본 탄광에 일하던 일본인 노동자들은 노동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젊은 일본인들은 대부분 전쟁터에 끌려 갔기 때문이다. 이런 나이 차이에 따른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 능력 우위를 고려한다면 민족간 임금 격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인들이 임금 차별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 이우연은 이 논문 내용을 반일종족주의 7장에서 간추려 설명 하고 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차별받았나?

일제시대에 자유로운 시장 거래가 이루졌다고 하더라도 총독부가 인허가, 관급 공사 수주 과정 등에서 일본인들에게 특혜를 주었다면 조선인들은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조선인들은 시장 경제의 틀 안에서 수탈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1910년에 제정되어 10년 뒤 폐지된 회사령은 조선 내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6&levelId=tg_004_1620&ganada=&pageUnit=10)은 회사령을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민족 자본과 공업 발전을 억제하기 위해 제정한 법령”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게 보는 근거로 “1910~1919년 회사 설립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인 회사가 27사에서 63사로, 일본인 회사는 109사에서 280사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일본인 회사 쪽이 회사 설립 허가를 훨씬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비율을 계산해 보면 조선은 회사는 2.33배(=63/27) 증가, 일본인 회사는 2.57배(=280/109) 증가 — 이 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회사령은 조선인 뿐아니라 조선에 진출하려는 일본인 기업가들에도 적용된 것으로 조선인들에게 특히 엄격하게 적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총독부가 회사령을 도입하려 하자 일본인들이 이에 반대했으며,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된 것은 조선인들의 민족 차별에 대한 항의 때문이 아니라 이 법 때문에 조선 진출이 어렵다는 일본 자본가들의 불만 표출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회사령은 제정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는데 회사령의 존재를 근거로 조선총독부가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개입주의 국가 (interventionist state)였다는 조장옥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시대에 커다란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분야라서 그렇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식민지기의 권력형 비리를 다룬 논문을 본 적이 없다. 이런 문제가 있었다면 죽창 한국사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어 많은 논문을 썼을텐데 말이다.

비민주적 식민지 지배 아래서 지대 추구 행위가 없었을 리 없다. 지대가 민족간에 어떻게 배분되었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보아야 할 흥미로운 이슈다. 그런데 인허가를 내 주고 관급 공사자를 선정하는 총독부 관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조선인 자본가들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 특권을 일본인에게 주거나 조선인에게 주거나 떡고물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인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 약자인 조선인들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은 더 많은 뇌물을 뜯어 낼 수 있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더 많은 특혜를 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 또 조선인들에게 지대를 배분해 주면 그들을 식민 지배의 파트너로 포섭하고 그렇게 해서 식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추가적 이점도 있다. 총독부가 망해 가는 “민족 기업” 경성방직회사를 재정 지원해서 회생시킨 사실은 이런 정치적 고려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小林英夫、植民地への企業進出 朝鮮会社令の分析.

일제시대에 국부(national wealth)가 유출되었나?

일제시대에 일본인 지주나 자본가들이 조선인 저임금을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벌고 이를 일본으로 빼내 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그렇듯 죽창 한국사학자들의 이런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자본이 유출되었는지 여부를 체크하는 것은 간단하다. 경상수지가 적자이면 자본이 흘러 들어 온 것이고 흑자이면 흘러 나간 것이다.

경상수지적자/명목 GDP

위 그림은 1911년 이래 한 세기 동안 경상 수지 적자액이 명목 총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이너스 값인 해는 흑자가 난 해).

일제 시대에는 대부분의 해에 경상수지가 적자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으로 자본이 흘러 나간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자본이 흘러 들어 왔다. 일제시대에 자본 유입이 경제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말, 1970년대와 비슷하게 높다.

1911-40년간 경상수지 적자가 난 해의 적자액을 모두 더하고 거기에서 경상수지 흑자가 난 해의 흑자액을 모두 더해서 뺀 값, 즉 이 기간 동안의 순 자본유입액 합계를 1940년의 고정자본 (=공장, 기계, 도로 등등) 총액으로 나누면 그 비율은 54%가 된다.

일제 시대 말기에 존재하던 생산 시설의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자본을 가지고 들어와 우리나라에 공장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궁핍화 성장

생산이 늘어난다고 반드시 소득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쌀을 수출하는 어떤 나라에서 쌀 생산이 늘어나자 그 영향으로 세계시장 쌀값이 폭락하면 이 나라 사람들의 소득은 감소할 수 있다. 이를 궁핍화 성장 (immiserizing growth)라고 한다

일본 정부는 일본 제국내의 안정적인 쌀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1920-34년간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했다. 농민들에게 저리 자금을 빌려 주고 댐, 보, 수로 같은 수리 시설을 건설하도록 유도하고 화학 비료 사용도 권장했다. 그 결과 조선내 쌀 생산은 산미증식기간 동안 25% 정도 증가했다.

부산 (실선)과 오사카 (점선) 쌀가격

위 그림은 산미증식계획 시작해서 5년이 지난 1925년을 정점 기준 이후 6년간 쌀 값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런 쌀값 폭락은 조선 농민들에게 큰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특히 수리시설 건설을 위해 대출을 받고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농민은 큰 어려움에 빠졌다. 그래서 농민들 중에는 농토를 팔아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자작지가 전체 논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

위 그림은 쌀값이 폭락하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전체 논에서 차지하던 자작지 비중이 약 4% 포인트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식민지기 토지 불평등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증가했다.

산미증식계획은 궁핍화 성장을 가져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쌀값이 폭락한 것은 조선의 쌀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 그림은 미국 밀 가격, 세계 시장 밀 가격도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조선 쌀 가격과 비슷한 폭으로 떨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는 곡물뿐 아니라 고무, 면화 같은 원자재 가격도 폭락했다. 조선 쌀 가격 폭락은 전세계적인 농산품 가격 하락의 일부분이었는데 이를 세계농업공황이라고 한다.

세계농업공황이 발생한 것은 일차대전으로 파괴된 금본위제도를 재건하기 위해 주요 선진국들이 긴축 통화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학회 회장 조장옥의 ‘친미파’ 경제사

아래 포스팅에서 내가 “허수아비 무찌르기”라고 조롱한 조장옥의 글은 산만해서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다.

조장옥의 글은 👇

http://home.sogang.ac.kr/sites/choj/economicdevelopment/Lists/b6/Attachments/9/(5)%EC%A1%B0%EC%9E%A5%EC%98%A5.pdf

근데 한번 더 읽어보니 조장옥이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대략은 알겠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경제발전이 한국 고도성장의 원인이 되었다고 내가 주장했다는, 엉뚱한 얘기를 조장옥이 왜 지어냈는지도 알겠다.

조장옥이 하고 싶었던 말은 한국 고도성장이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으로 일어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친미파 한국 경제사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이를 조장옥은 친일파 한국경제사라는 허수아비와 대비시켰다. 이를 통해 (보편화된) 반일 정서와 (경제학자들의) 친미 정서를 건드리고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레토릭을 그는 구사한 것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아 대학에 취직했다).

내가 조장옥의 주장을 학문적 비판이 아니라 싸구려 정치 담론 정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1) 상대방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을 뿐 아니라 2) 그가 대는 근거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3)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펴기 때문이다.

조장옥은 논문 37쪽에서 “해방과 전쟁을 통해 경제 발전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잔재가 대부분 제거되고 미군정 그리고 미군의 참전과 주둔으로 미국의 제도가 대거 유입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한국 고도성장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을 가로막았던 일본 제도란 구체적으로 뭔가? 해방후 도입되어 고도 성장을 가져왔다는 미국 제도란 또 뭔가? 조장옥은 이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해방 후 오랜 기간 식민지 시대의 일본식 제도 (예를 들어 사법 제도, 소유권 제도, 교육 제도, 호구 제도 등)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서구의 제도는 아주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Cumings(1981: 206-36)). 제도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 관계에 영향을 미치므로 급격히 일어나지 않는게 보통이다. 해방되고 미군정을 거치면서 일본 제도가 단기간에 미국 제도로 교체되었다는 말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게다가 조장옥은 미국 제도 도입이 한국 고도성장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바로 앞 쪽 (36쪽)에서 “제도는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즉 제도 개혁만으로는 경제 성장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조장옥은 37쪽에서 한국 고도 성장의 원인으로 “해방이후 교육을 통한 인적 자본의 축적”을 아울러 들고 있다. 미국 제도가 필요 조건이고 인적 자본 축적이 충분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인적 자본은 어떻게 해서 고도 성장을 일으키나?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하나는 인적 자본 투입이 빠르게 확대되어서 생산 증가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물적 자본이나 노동 투입 증가가 빠르면 생산 증가가 빨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데 해방후 인적 자본 축적 속도가 빨라지기는 했지만 이걸로 설명할 수 있는 해방 전과 후의 경제 성장율 차이는 크지 않다 (기아와 기적의 기원 5 장을 보라)

다른 하나는 인적 자본이 많으면 기술 개발이나 기술 학습이 촉진되기 때문에 생산이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그런데 1960-90년간의 한국 고도 성장에서 기술 발전의 역할은 중요하지 않았으며 물적 자본 축적이 핵심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해방 전에 비해 해방 후에 인적 자본의 수준이 높았던 사실이나 인적 자본이 더빨리 증가한 사실로는 한국의 성장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1945 이전과 이후에 제도적 환경이 별로 다르지 않았고, 인적 자본 수준이나 성장율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해방 이후 성장 가속화가 미미하므로 조장옥의 한국 성장 기적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시경제학자가 이런 엉성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조선총독부는 리바이어던?

조선총독부는 죽창 한국사학자들이 주장하듯 조선인 개개인의 생산 및 소비 활동을 통제할 수 있던 막강한 노예 농장 주인이었나? 말도 안되는 얘기다.

위 그림은 1911-2015년간 정부의 세금 수입이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 즉 조세부담율(%)이 꾸준히 증가해 갔음을 보여 준다. 이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정부의 활동에는 돈이 들고 이 돈은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를 비교해 보면 조선총독부의 능력은 대한민국 정부의 능력에 비해 훨씬 미약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세 부담율이 20%에 달하는 오늘날에도 정부가 개인의 생산과 소비 활동을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조세 부담율이 평균 5%를 조금 넘었던 일제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위 그림에서 식민지 시대는 1911-40년을 가리키는데 일제시대 마지막 5년간 이차대전 때문에 정부의 개입이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전쟁이 터졌다고 해서 정부가 세율을 하루 아침에 크게 올릴 재간은 없고 따라서 전쟁 수행을 위한 정부의 기능 확대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설명한 것처럼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이나 섹스 동원은 시장 메카니즘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쌀 수출? 쌀 수탈?

조선총독부는 죽창 한국사학자들이 말하듯 조선 농민들의 쌀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가지고 갔나? 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강제되지 않은 무역 거래의 결과였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오사카 (점선)와 부산 (실선)의 쌀값 (엔/石)이다. 두 지역의 쌀 값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쌀값은 오사카보다 부산에서 약간 낮았는데 이 차이는 수송비 및 기타 거래 비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두 도시의 쌀값은 사실상 같았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자유로운 쌀 무역이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만약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쌀을 빼앗아 일본으로 반출했다면 공급이 감소한 조선의 쌀값은 공급이 증가한 일본에 비해 훨씬 높아야 했을 것이다.